경주는 수학 여행지로 각광받는 도시입니다. 해마다 수많은 중,고등학생들이 경주로 수학여행을 떠났습니다. 1000년가까이 신라의 도읍지였던 경주에는 많은 역사 문화적 가치를 가진 유물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경주의 역사 문물을 보며 신라의 숨결을 기억해내고자 합니다.
하지만 이 경주의 문화유적 발굴에는 뼈아픈 역사적 사실이 숨겨져 있습니다. 대다수의 경주 유물들은 일제 강점기 시절에 발굴되었습니다. 이것은 곧 우리의 유물들이 일제의 손에 발굴되었으며,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한 채 세상 밖으로 나왔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본래 역사 유물의 발굴은 충분한 검증을 거친 다음, 전문가가 동행한 상태에서 진행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경주 왕릉의 초기 발굴 작업은 단 4일만에 이루어질 정도로 주먹구구식이었으며, 제대로 된 전문가의 참관 없이 이루어졌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 좌 : 금령총 우 : 금관총)
사진출처 : 구글 이미지
금관총은 1921년 9월에 발견이 되었습니다. 최초 발견자는 노서라 주막 운영자인 '박문환'이라는 사람이었죠. 그런데 이 왕릉은 단 4일 만에 모든 조사 및 발굴이 완료되었습니다. 당시 총독부 촉탁이었던 '모로시카 히로오'라는 자의 주관 아래 진행이 되었는데, 꼼꼼히 조사하고 고증한 후 진행되었다고 보기에는 어렵습니다. 급기야 1927년에는 금관총의 유물이 도난당하는 사건까지 일어났습니다. 제대로 된 관리가 되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경주에는 서봉총이라는 왕릉도 있습니다. '서봉총'이란 이름은 스웨덴 황태자인 아돌프 구스타프가 발굴에 참여한 것에서 유래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서봉총의 발굴과정도 심상치가 않습니다. 1926년 주변 공사를 하다 발견된 이 왕릉은, 당시에 공사를 맡던 토목공사 업자와의 타협 하에 발굴이 진행되었습니다. 봉분을 깎아 나오는 흙을 토목 공사용으로 제공한는 대신 발굴을 계속 진행하도록 이야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조심스럽게 다뤄지기는 커녕, 공사 장애물 정도의 취급을 받았던 모양입니다.
이 서봉총 발굴에는 비하인드 스토리도 있습니다. 1937년 평양에는 '차릉파'라는 기생이 있었습니다. 당시 평양 박물관은 경주 유물을 가져와서 전시를 하고 있었는데, 박물관장이었던 고이즈미가 사고를 치고 맙니다. 술에 거나하게 취해 기분이 좋아진 고이즈미가 차릉파라는 기생에게 출토 유물을 착용하게 한 다음 이것을 감상했던 겁니다. 다분히 고대 유물에 대한 불손한 행위라고 볼 수 있는 작태였습니다. 조선 여성을 희롱하였다는 점에서도 지탄을 받아 마땅한 일이었고 말입니다. 하지만 기생 '차릉파'는 이 일로 말미암아 당대 최고의 기생이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경주로 수학여행 온 일본 학생들
자료출처 : 동아일보
우리에게 익숙한 첨성대는 어떨까요? 위의 사진은 일제 강점 당시 경주로 수학여행을 온 일본 학생들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올라타고 있는 물체는 첨성대인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당시 첨성대는 길가에 방치되고 있는 탑 정도의 대접밖에는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일본 학생들로부터 저런 대접을 받았다는 것은 정말 곤란한 일입니다. 이것은 조선에 대한 당시 일본 젊은이들의 태도를 보여주는 상징물과도 같습니다.